스데반 의 순교 | [하이바이블]E.249“스데반의 순교”(사도행전 7:57-60) 상위 32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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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최초의 순교, 스데반(행 7:54~60) – KMC뉴스

베드로의 복음증거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룩되고 갑자기 부흥되므로 수천 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으므로. 교회에서 펼치는 구제사업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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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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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 집사의 순교 설교 가운데 나타난 네 가지 실수 – 기독일보

사도행전의 주요 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이다. 스데반은 사도도 아니요 집사인데, 공회에서 긴 설교를 했으며, 그의 설교는 도중에 중단되었고 곧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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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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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신앙 –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2015년 가을 사도행전 제 6 강 스데반의 순교신앙 말씀: 사도행전 6:8 – 7:60 요절 : 사도행전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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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angmoolee.tistory.com

Date Published: 5/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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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 3가지 – 기독일보

미 기독교 미디어 사이트 ‘크로스워크(Crosswalk)’의 ‘베키 할링(Becky Harling)’이 사도행전에 돌팔매질을 당해 순교한 집사 스데반의 죽음으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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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daily.co.kr

Date Published: 7/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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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 ‘순교 설교’는 치밀했다” – 기독신문

스데반의 순교. 렘브란트(1635). 이름으로 봐서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스데반 집사는 회당에서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주장하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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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11/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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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 (행 7:55-60) – 생명샘교회

스데반의 순교. * 사도행전 7:55-60.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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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livingspring.net

Date Published: 6/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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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예배강설 – 스데반의 순교가 주는 의미 – 지팡이교회

스데반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하늘을 웅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고, 순교를 앞두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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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eformch.org

Date Published: 8/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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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스데반 의 순교

  • Author: HI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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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6.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q-2kdIWEj3o

47. 최초의 순교, 스데반(행 7:54~60)

베드로의 복음증거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룩되고 갑자기 부흥되므로 수천 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으므로. 교회에서 펼치는 구제사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 7명의 집사를 선택할 때 그 중의 한 명이 스데반이었다. 스데반은 이방 태생의 헬라파 유대인으로 가정 배경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없으나 평판 높은 상류 계급 출신으로 집사의 조건을 갖춘 좋은 일꾼이었다.

예수의 십자가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에 의해 복음이 급속하게 확산되자, 모세의 율법과 전통을 생명처럼 여기던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이 점점 심해지고 있던 때,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스데반이 회개를 촉구하며 말씀을 증거 하므로 이에 분노한 자제심을 잃은 군중들이 흥분하여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잔인하게 죽이고 만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면서 영광스런 기독교 역사에 첫 순교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첫째: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 7:54~60)

1) 믿음과 성령의 충만(행 6:5~8)

믿음(pivsti”)은 설득하다……와 친분을 가지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어떤 것의 진실성에 대한 기대와 확신을 뜻한다.

이 세상은 어쩌면 믿음의 관계로 가득 차 있다. 실상 믿음이 없으면 잠시라도 살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는 믿음의 관계가 점점 형편없게 되어가고 있다. 부부지간에도 신뢰감이 희박해져 가고 있다. 국민들이 대통령의 말을 믿지 않으려 한다. 검찰이 기업 수뇌들을 줄줄이 불러들여도 성역 없는 수사를 하고 있다고는 믿지 않고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확신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로 믿음이 사용되고 있다. 믿음으로 구원도 받고 믿음으로 영생도 받는다. 본문의 스데반은 믿음이 강한 자로 인정되어 집사 직분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한 자였다. 성령은 공기의 움직임, 비물질적 실체, 또는 영혼을 뜻하는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집사였다. 성령은(pneu’ma) 육체와 구분된 것으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인간의 전 존재를 결정짓는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영혼을 가리킨다,

오늘 본문의 스데반은 위의 모든 것을 갖춤으로 7집사 중에서도 특출했고, 믿음과 성령의 충만으로 기사와 표적까지 행하였다. 성령의 충만한 능력까지 받은 스데반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서 상식을 초월하는 놀라운 신유의 역사도 행사하였다. 지혜와 믿음의 충만함이 인격적인 면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라면 권능은 성령의 은사적인 면에서 나타난다. 과연 스데반은 놀라운 평신도 사역자요 주의 종으로도 손색없는 귀한 종이었다.

2) 지혜와 성령으로 증거(행 6:9~10)

스데반이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때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증거하다 겪었던 것 같이, 스데반도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과 변론을 하게 되었는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예수 당시에도 대적자들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씌웠는데 스데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현상은 악이 득세하는 이 세상에서 주의 종들이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겪는 핍박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과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면서 압도당해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며 믿었듯이, 스데반 집사 또한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복음 증거로 인하여 대적자들이 변론을 통해서 이길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주의 종을 통해 증거 되어지는 복음은 반박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증거 되었다.

둘째: 믿음에 의한 최초의 순교자

1) 하늘의 소망을 간직함(행 7:54~56)

예루살렘을 중심 한 초대교회의 부흥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열도를 더해갔고 많은 교민들이 모이곤 했다. 이때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의 활동은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사방에서 모인 사람들과 회당에서 변론할 때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무리를 충동하여 스데반을 공회로 잡아오게 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6:11~13)하는 말을 했다고 거짓 증인을 세워 증거하고 곤경에 처하게 했는데도,공회에 앉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6:15)같이 빛났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대적자들이 스데반을 향하여 찔린 마음으로 살기등등하여 이를 갈 때에도 스데반은 죽음을 앞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하늘에 계신 주를 바라보면서 감격과 기쁨을 표현했다(7:54).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빛나는 얼굴빛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생명과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생명력 넘치는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에게는 어떤 험악한 상황이 전개되어도 전혀 장애를 받지 않고 목숨을 걸고 담대해짐을 보게 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어찌할 수 없는 절대 평안과 신령한 기쁨을 허락해 주신다.

2) 최초의 순교자(행 7:59~60)

스데반은 이를 갈고 있는 유대인을 향해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7:56)고 말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큰 소리 지르며 귀를 막고 성 밖으로 스데반을 끌어내어 돌로 쳤다. 이 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하며 순교 당하였다. 스데반의 이러한 기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아버지께 드린 기도와 같은 내용이다. 만약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어떠한 모습으로 맞이할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십자가상의 칠언은 그를 따르는 주의 종들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이에 대한 양편의 강도들의 반응에서도 인간들의 반응을 시사해 준다.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하며 최후의 발악을 하는 모습이었고. 다른 편의 강도는 믿음으로 자기의 생명을 위탁하므로 예수의 십자가를 중앙에 두고 복음과 저주로 양분되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모든 인간이 누구나 최후에 경험해야 하고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판가름하는 판결을 받게 된다.

어쨌든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최대의 순교자로서 값진 죽음을 당하였고 그가 순교할 때 그 자리의 책임자는 후에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선교사명을 훌륭히 수행한 사울이라는 자였다. 아마도 사울이 기독교인들에게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대장 노릇을 했어도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천사의 얼굴 모습으로 죽이는 자들의 죄의 용서를 비는 장면에서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 후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결박하기 위해 가는 도상에서의 경험에서 주의 종으로 탈바꿈된 과정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된다.

스데반의 순교의 피는 복음의 열매가 맺혀지는 밑거름이 된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 역사, 아니 우리나라 선교역사를 보아도 신앙의 선조들의 생명을 내건 복음의 열정과 순교들이 오늘의 부흥을 가져온 밑거름이 되었다. 스데반으로부터 시작된 순교자들의 생명을 건 진정한 헌신은 복음이 만방에 증거되어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현대는 스데반이 살던 시대와 같은 핍박의 시대는 아니지만 악의 도전은 시험과 유혹으로 충만해 있으므로 스데반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헌신하며 충성하는 주의 종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너무 안일에 빠지고 어려움을 극복할 능력을 상실한 종의 모습을 자책해야 한다. 목사나 평신도도 마찬가진데 스데반과 같은 복음의 열정으로 믿음, 성령 충만, 지혜로운 말씀으로 무장하여 오늘을 극복하는 종의 자세를 회복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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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 집사의 순교 설교 가운데 나타난 네 가지 실수

<'확대경으로 본 바이블' 연재를 통해 성경 속 숫자에 나타난 의미를 성경 자체로 깊이 있게 풀어내 많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을 전달하고 있는 김근태 목사의 두번 째 시리즈 '현미경으로 본 바이블(Microscopic Bible)'을 시작한다. 성경 속 이야기를 성경 안에서 마치 '현미경'으로 본 것처럼 한 구절 한 구절 자세히 설명하면서 탁월한 해석을 더하고 있는 '현미경으로 본 바이블' 시리즈는 특별히 성경공부를 위한 질문도 함께 개제돼 신앙의 성장을 돕고 있다. 또한 영어버전도 준비돼 있어 개인적으로 요청하는 이들에게 매주 전달되고 있다. 자세한 문의나 질문은 김근태 목사의 이메일 [email protected]로 연락하면 된다.>

본문: 사도행전 7:54-60, 제목: 스데반의 순교 설교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생명을 내걸고 복음을 전파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실로 영혼 구원은 인간의 말과 힘과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이기에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한다. 또한 주의 종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믿음의 확신과 담대함으로 설교할 때 불신자들이 믿고 구원에 이르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설교행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설교는 10개가 있다. 베드로의 설교는 2,3,10장에 3번 기록되어 있고, 7장에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 바울의 설교는 13,17,20,22,24,26장에 6번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주요 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이다. 스데반은 사도도 아니요 집사인데, 공회에서 긴 설교를 했으며, 그의 설교는 도중에 중단되었고 곧바로 순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데반은 초대교회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에 비교하면 차이점을 갖고 있다.

스데반이 왜 이런 최후의 설교를 하게 되었을까?

1. 스데반이 집사가 되고 예루살렘 공회에 서기까지 (행6장)

초대교회는 성화된 무리들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였다. 그런데 초대 교회가 부흥해서 많은 성도를 가진 큰 공동체를 이루게 되니, 그곳에도 문제가 일어난다. 교회에서 구제를 행하는데 히브리파 과부들만 구제의 대상이 되고, 이방에서 태어난 헬라파 유대인(외국에서 태어난) 과부들에게는 구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이 들고 일어나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 전념하기로 하고, 헬라파 유대인 중에 집사 7명을 택하여 저들로 구제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 7명의 집사들 중의 대표가 스데반 집사였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지혜와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니 많은 역사가 일어났다. 이에 반발한 자들이 당을 지어 예루살렘 공회에 스데반을 끌고 가서 ‘그가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다’며 재판을 받게 하였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 초조함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공회에 앉은 자들의 입으로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6:15)고 성경은 말해준다.

2.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때 실수한 것들 (7:2, 4, 14, 15-16절)

공회에서 대제사장이 스데반을 정죄한 내용을 말하며 “이것이 사실이냐”(1절)고 물었다. 스대반은 “여러분 부형들이여!”라고 말하며 그의 설교를 시작했다. 설교를 자주 많이 하는 분들은 나름대로 그 내용에서 실수를 하게 됨을 자신은 알게 되는데, 성경을 계속 공부하다 보면 전에 알고 설교했던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스데반도 외국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그 당시에는 성경을 쉽게 구할 수도 없었기에 전해지는 말로만 알고 있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스데반은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저들은 다 성경에 능통한 자들로 구약의 사건들을 정확히 알고 있던 자들이다. 스데반의 설교 내용에서 그의 잘못을 알고 있었거나 말에 실수한 내용이 몇가지 발견된다.

첫째는 1-2절에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라 말했다. 그러나 실제, 메소보다미아를 떠날 때는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가족을 데리고 떠났다(창11:32)고 성경은 말해준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 하란에 머물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을 때에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고 지시하셨다(창12:1).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다시 떠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창12:5)고 성경은 말한다.

둘째로 4절에 아브라함이 그 아비 데라가 죽었을 때 하란을 떠났다고 설교했지만, 아브라함은 데라가 70세에 출생했으며(창11:26), 그가 75세( 창12:4) 때 하란을 떠났으니(창12:4), 아브라함은 그의 부친이 145세에 하란을 떠났고,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창11:31)까지 살았다. 즉, 아브라함은 그 부친이 죽었을 때 가나안으로 떠난 것이 아니요 살아 있을 때 떠났다.

셋째로 14절에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75 사람을 청하였더니’라고 설교했지만 구약은 야곱의 가족 70명(창46:27) 이라고 말해준다.

넷째로 15-16절에 ‘야곱과 그 조상들이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구약은 아브라함 부부, 이삭의 부부, 야곱의 부부가 모두 유다 지역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에 묻혔으며, 그 굴은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자기들의 장지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창49:29-33, 50:13-14). 그리고 세겜에 있는 땅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에게서 금 일백으로 산 땅이었다(수24:32). 그 땅에는 요셉만 묻히게 되었다.

스데반 집사 설교의 이 실수는 공회원들을 격노케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위대한 지도자는 여호수아와 갈렙이었는데,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즉, 요셉 지파의 후손이었으며 갈렙은 유다지파의 후손이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 유다의 후손인 갈렙은 요셉의 후손인 여호수아에게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부탁하였다. 왜냐면 그 산지에 헤브론이 있었으며 그곳에 자기들의 조상들이 묻힌 막벨라 굴이 있었기 때문이다(수14:12-13). 그런데 여호수아는그의 선조인 요셉의 시신을 세겜(사마리아)에 묻었던 것이다.

그 후 이스라엘은 두 왕조로 갈려졌고 북왕조는 세겜(사마리아)을 중심으로한 나라가 되고, 남왕조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두 나라가 대립하였다. 그 후 북왕조는 앗수르에 망하면서, 그 땅 사마리아인들은 혼혈족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예수님 당시에는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인(북왕조)들을 업신여기며 상종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때에 유대의 교권자들 역시 사마리아인이나 헬라파 유대인들을 아주 업신여겼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인 스데반이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를 전파하니 저들의 눈에 가시인 것도 모자라. 그의 설교에서 자기들의 조상들 모두가 세겜(사마리아)에 묻혔다고 하니 공회원들은 설상가상으로 더욱 격분하게 되었다.

3. 스데반 집사의 순교 설교 (37, 48절)

스데반 집사의 서론 부분에 그의 실수가 보였지만 그의 설교의 핵심으로 37절에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37절)고 본론이 시작한다. 실로 그 뜻은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가 “나(모세)와 같은 선지자 한 분을 보내시리라”(참:신18:15-20)고 말한 그 사람이 곧 예수라고 스데반은 증거 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라는 증거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성전에 관하여는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48절)라고 설교하면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으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도다”(51-53절)라고 스데반은 공회원을 향해 비수의 강한 메시지를 선포했다. 이 말을 들었던 모든 자들이 분노하여 이를 갈았으며 그들 중에 사울(바울, 헬라파 유대인)도 있었다. 사울 역시 당대에 구약에 능통했던 자였다.

4. 스데반의 영광의 순교 (54-60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며 영안이 열려 천성의 보좌를 보았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말하니 저들이 귀를 막고 일심으로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끌로 나가 저들의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두고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돌을 들어 그를 치니 스데반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서”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며 또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하며 최초의 순교자로 영광의 길을 가게 되었다. 성경은 그가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자니라”(60절)고 말해준다.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두 마디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일곱 마디 중에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예수께서 십가가상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주여,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운명하였다.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성경에 능통했던 사울(바울)이 스데반의 설교의 내용에 잘못 말한 부분들을 일일이 지적해서 스데반이 알아듣도록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 내용이 “이 죄” 즉 “나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순교의 길을 가는 그의 순진한 회개가 사울의 심령에 박히게 되지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내 모든 실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아름답고 영화롭게 하시는 예수

스데반 집사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실수는 오히려 영광의 최초의 순교자의 면류관을 얻게 되었고 복음의 최대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는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키는 역사를 이루었다. 우리도 말에나 행동에 실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를 증거하며 예수를 높이는 삶을 살아간다면 분명 우리 모두는 면류관을 얻게 되는 영광의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성경공부

1. 스데반은 누구이며 어떻게 집사가 되었고 그가 왜 공회에서 설교하게 되었는가?

2. 스데반 집사의 설교 중에 실수한 내용이 무엇인가?

3. 스데반 집사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4.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는가?

말씀 묵상과 나눔

1. 내가 말과 행동에서 실수 한 적이 있는가? 그럼에도 그 결과가 좋게 나타난 것이 있었는가 말해보라.

2. 내가 복음을 전하며 전도할 때 큰 반발이나 공격을 당한 적이 있는가 말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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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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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가을 사도행전 제 6 강

스데반의 순교신앙

말씀: 사도행전 6:8 – 7:60

요절 : 사도행전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좀 무겁습니다. 제목에 ‘순교신앙’이라는 말을 붙어 있어서,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순교를 준비해야하는가 하는 심리적 압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한창 은혜 받을 때는 ‘주님, 제가 순교하게 해주십시오’하고 일사 각오하며 열정적인 기도를 해보셨을 것입니다. 김모세 목자님도 한때 상당한 기간 동안 제가 순교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겁 많은 자인가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순교를 위해 기도한 것은 후회하시고 ‘주님, 제가 제 자신을 잘 알고 겸손히 신앙생활 하다가 천국가게 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기도로 바꾸었다고 하셨습니다. 적지 않은 목자님들이 다 이런 과정을 밟으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큰 소리치기 보다는 오늘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이 은혜를 믿음으로 감당하며 사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스데반의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잘 배우고 이제는 감사하므로 오직 주님 한분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종들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6장 1-7절을 보면 교회 안에 제자들이 많아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문제도 많아집니다. 이런 만큼 사도들의 헨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렸고 또 ‘카톡’, ‘카톡’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교회 안에 이런저런 일을 좇아다니고 접대하기에 바빴습니다. 이래서는 도저히 말씀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이라고 해서 입만 열면 명설교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원고를 준비하고 리허설도 하고 기도도 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이것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믿음과 성령에 충만한 사람 7명을 선출해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안수하여 구제 등, 교회 안에 많은 일들을 맡겼습니다. 이로서 교회는 말씀 중심의 역사를 잘 이루어갈 수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역할 분담을 하고 사도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전할 때 이런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세워진 일곱 사람 중에 스데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8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뿐 만이 아닙니다. 그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성경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9절에 보면 스데반은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아시에서 온 사람들과 회당에서 변론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정통 유대인들로서 성경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말로 해도 스데반의 말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고 또 올바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참 구주임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요 교회의 주인이요 양들의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참으로 죄악됩니다. 인본주의 사상과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주의 말씀과 은혜와 권능에 충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스데반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많이 세워주셔서 구원역사에 귀하게 사용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사람들이 그를 능히 당하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거짓 증거를 하며 스데반을 공회에 고소했습니다.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면서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해준 율법의 규례를 고치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스데반의 말을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곡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렇게 고소했지만 스데반은 어떠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은 고소되고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해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때도 성령에 충만하여 그 얼굴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심령에 은혜와 믿음, 담대함이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충만한 사람은 어떤 위협이나 환경 가운데서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어려울 때 더욱 빛이 납니다.

이제 7장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이 ‘이것이 사실이냐?’하며 물었습니다. 이에 스데반은 그들 앞에서 아주 긴 변증적 강론을 합니다. 그의 이 강론은 복음에 대한 역사적 탐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의 강론 내용이 어떠합니까?

첫째, 그는 하나님은 그들 구원을 은혜로 시작하셨지만 이스라엘 조상들은 감사하지 않고 늘 하나님을 거스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16절까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에서 시작해 그와의 언약과 축복을 말하며 이어 나타난 이스라엘 조상들의 죄악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친히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이때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우상들과 구별되어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참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을 좇아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고 있는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당대에는 아직 자식도 없고 발붙일 만큼의 땅도 주지 않으셨지만 그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 되어 그 땅에서 종이 되어 400년 동안 괴롭게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조상들은 종 삼고 괴롭혔던 나라를 심판하시어 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시고 그가 후에 이삭을 낳았을 때 8일만에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할례는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그 약속을 살에 인친 것입니다. 그 후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았습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과 언약의 할례을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이 땅에 거하게 된 것이 그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깨닫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된 것은 모세의 율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위대한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것은 이렇게 시작부터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은 율법을 지킨다느니 성전에서 제사들 드린다느니 자기 의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이러게 그들의 시작에 무엇이 있었는가, 곧 부르심과 일방적인 은혜와 언약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음을 말했습니다.

실제 자기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자랑하는 그들의 조상들은 이런 부르심 이후 어떠했습니까? 과연 훌륭했습니까? 스데반은 계속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았는데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았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죽이려고 했는데 르우벤이 막아서 그나마 노예로 팔아버린 것입니다. 팔아버리면 그를 사랑하는 아버지 야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아버지 야곱의 고통이야 어떻튼 미운 놈 일단 없애버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조상들은 이렇게 그 근본이 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의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부어주셔서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애굽과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다 굶어죽게 되었을 때 요셉이 그들을 불러 다 먹여 살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 그들의 죄악을 다 용서하고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애굽에 들어와 살게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조상들은 이런 악한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요셉을 애굽의 총리요 그들의 구원자로 삼으시고 한량없는 긍휼로 그 조상들의 생명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스데반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의 죄악과 함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아무 죄 없는 에수님을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하나님께서 살리사 영화롭게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은 자랑스럽습니까? 아닙니다. 그 열두 지파 조상은 악했습니다. 그런데 다만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17-43절까지의 이야기로서 여기서 스데반은 모세를 키우시고 자기 조상들을 출애굽시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애굽으로 옮겨간 이스라엘 백승들은 크게 번성하여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왕이 그의 조상들을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노예로 부려먹었습니다. 그리고 사내아이들은 태어나는대로 다 나일강에 던져버리게 했습니다. 이런 때에 태어난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여서 부모들이 석달 동안 집에서 몰래 기르다가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을 때 나일강에 띄워 보냈는데 애굽 공주가 이 아기를 보고 건져내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궁중에서 지도자로서 인간 기초를 쌓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그가 나이 40이 되어 그 형제 이스라엘을 돌보고자 했습니다. 하루는 백성 중 한 사람이 애굽 사람들에게 원통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들을 쳐죽여 원수 갚았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 손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구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이튿날에서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이들을 화해시키려는데 이때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리면서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어제 애굽 사람 한명 죽이더니 나도 죽이려느냐’ 하면서 배척했습니다. 이에 모세는 큰 충격을 받고 도주하여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다 버리고 동족을 돕고자 했는데 그들은 이런 모세를 인정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이것도 그들 조상의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광야에서 키우시고 그 백성의 인도자로 예비하셔서 모세를 불러 그를 통해 조상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이때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 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나님은 애굽의 이스라엘 조상들은 크게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조상들이 배척한 모세를 다시 세워 그들을 인도하여 내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열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고 광야에서 40년간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리고 반석을 터뜨려 물을 내면서 그 백성을 보호해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도 요셉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조상들이 죄 가운데서 배척했던 모세를 통해 그들을 구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가 어떠했습니까? 출애굽 후 에 이때 조상들은 마음을 완악하고 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춤추며 기뻐하던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대로 된 희생과 재물을 드리기는 커녕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들 등 온갖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아주 죄악되게 하나님을 대적했음을 지적했습니다. 이랬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바벨론에게 망하고 그곳으로 다들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하셨겠습니까! 스데반의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이렇게 목이 곧고 불순종하며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원수로 갚고 제멋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다 하고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셨다하며 우리는 이 율법을 지키며 살고 있다며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 속에서 위대한 업적들만 기억하지 그 조상들이 얼마나 죄악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말해 지우고 싶은 흑역사는 감추고 자랑스런 역사, 위대한 역사만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그들은 교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상들의 죄를 안돌아보니 자기들이 얼마나 죄악된지를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잘못된 역사 인식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은 결국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의 이야기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시지만 옛날 조상이나 지금의 이스라엘이나 그 마음이 완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역사 인식이 어떠합니까? 그가 본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어떠합니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원의 은혜, 그리고 죄악된 배반의 역사를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된 자기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긍휼히 여기시고 감당하시고 구원하시고 축복해주셨는가를 기억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런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정말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배우고 깨달은 것입니다.

얼마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방문해 방명록에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말을 썼다고 합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생각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많은 특권을 자랑만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서 시작한 것인지 음수사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죄악된 자기들을 발견하고 자기들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질 못해 감사는 없고 자기 주장이나 하고 완악하게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결국에 그리스도를 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구원과 영생의 축복이 어디서 왔는가를 잘 기억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이 참 죄악됩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은혜와 축복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죄악을 반면 교사삼고 음수사원하면서 겸손히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고 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셋째, 그는 참 성전되신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44-50절까지입니다. 본래 성전은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양식을 따라 만든 증거의 장막이었습니다. 이 장막은 텐트입니다. 이 증거의 장막은 하늘에 있는 참된 장막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증거의 장막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가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존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때에 성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성전은 아름답고 웅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이 지은 이런 곳을 집으로 삼으시겠습니까? 스데반은 이것을 성경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 지적했습니다. 4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하늘을 보좌 삼고 땅을 발등상으로 여기십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성전의 한계를 알 수 있고 그것에 매이기보다 성전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 성전을 절대시 하여 어찌하든지 성전을 붙들고 여기에 못매달고 자랑하고 자긍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들의 고의적인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스데반이 말한 조상들의 그 완악한 죄악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의 결론으로 스데반은 그들에 담대하게 말합니다. 51-53절을 보십시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리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의 이러한 말은 성전을 붙들고 있는 대제사장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들은 이제 성전 건물에 매달리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그 선지자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그를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오시리라한 의인’ 곧 예수님을 잡아 살인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새로운 성전으로서의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54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분해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이를 가는 것은 웬만큼 분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극도의 분노 상태에서 반사적으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분노의 뚜껑이 열렸습니다. 스데반은 이런 가운데서도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스데반을 영접하시고자 그 보좌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기가 싫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합심하여 달려들어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는 자신의 영혼을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 그는 이 말을 하고 잤습니다. 그의 기도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기도와 같습니다. 그가 어떻게 무서운 고통 가운데서도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품고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갔습니다.

스데반은 영광스럽게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는 그것으로 무의미하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의 교회는 그의 순교를 늘 기억하며 그의 뜨거운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순교에 이어진 대대적인 교회 핍박으로 인해 교회는 세계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이로서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 나가는 세계선교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가 개척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11:19). 뿐만 아니라 박해자 사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그가 후에 바울로 거듭나는데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순교를 받으시고 복음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스데반의 순교 신앙을 마음으로 잘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터툴리안은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토마스 목사는 조선 땅을 밟자마자 대동강변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끝까지 신사 참배를 거부하시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 피신할 기회가 있었지만 끝까지 양떼들을 지키려 하시다가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다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순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흘려 목숨을 바치는 순교를 가리켜 ‘적색 순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순교 신앙이란 꼭 피를 흘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란이 있어도 그 믿음을 지켜나가는 신앙이 순교 신앙입니다. 이렇게 평소에 순교자적 삶의 자세로 사는 신앙을 가리켜 ‘백색 순교’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고 해서 돌에 맞을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감옥에 갇히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국회의원들이 표를 얻기 위해서 앞다투어 교회에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안정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느슨해져서 사단의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지금은 스데반 시대와 같이 비난과 핍박의 돌맹이가 아니라 안일과 쾌락주의, 물질주의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대적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신 안에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안락을 추구하고 편함을 추구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교적 결단과 순교적 자세가 아니면 이러한 시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백색순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나를 끊어버리고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순교하는 마음으로 살 때, 그 삶이 바로 순교의 삶입니다.

사도바울도 친히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이런 백색순교신앙이 있었을 때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드리게 한 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느닷없이 뜬금없이 순교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백색순교자의 삶을 산 사람만이 적색순교자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우리에게 먼 단어가 아닙니다. 순교는 우리가 사는 문화이며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음란하고 죄많은 세상에서 믿음의 순결을 지키며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에 깊은 감사가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알고 이런 나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알 때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 내 인생에 대한 역사 해석을 스데반처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제대로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은혜에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을 알고 자기를 부인을 배워 하나님의 뜻을 섬겨가면서 참된 순교 신앙을 우리의 삶속에서 조금 조금씩 구현해나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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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 ‘순교 설교’는 치밀했다”

▲ 스데반의 순교. 렘브란트(1635).

이름으로 봐서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스데반 집사는 회당에서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주장하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신랄한 논쟁을 벌인다.

사람들은 그의 율법관과 성전관에 반발했고 분노했다. 그들은 그를 율법과 성전을 위협하는 자,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여겼다. 스데반은 히브리 민족이 가장 소중히 간직해 온 종교유산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위험인물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의 주장은 과격했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처치해야 했다. 그래서 거짓증인들을 내세웠고 군중을 동원했고 장로들과 서기관들 같은 사회적으로 공신력 있는 사람들을 선동했고, 그리고 결국 유대인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 고소했다.

공회 앞에 선 스데반에게 대제사장은 거짓 증언자들의 주장에 대해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스데반의 저 유명한 순교설교는 시작된다.

김정훈 교수는 이 순교 설교를 시작(행7:2a)과 전개(행 7:2b-50), 마무리(행 7:51-53)로 나눠 꼼꼼하게 분석한다. “형제들과 아버지들이여, 들으십시오”라는 짧은 한 마디에서 김 교수는 이 설교자의 침착성, 청중에 대한 예의를 발견한다. 스데반은 자신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의 청중들을 “형제들과 아버지들”이라고 부르고, “들으십시오”라는 짤막한 말로 주의를 환기시킨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먼 족장들의 이야기(행 7:2b-16)로부터 출애굽과 모세 이야기(행 7:17-38),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배도 이야기(행 7:39-43), 광야의 장막과 솔로몬 성전 이야기(행 7:44-50)로 전개된다.

율법의 권위를 무시하고 성전의 영구적 신성을 부인하는 자라는 자신에 대한 중상에 맞서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역사회고 방식을 사용하여,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장구한 역사를 조망하고 자기네 민족이 어떻게 자기 정체성과 자기이해를 구축해 왔는지 살피는 대항 논리를 전개한다. 또 그는 논쟁의 핵심에 있는 모세의 앞 뒤 역사를 풀어나가며 유대교 사상이 어디에서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폭로하고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그들의 종교를 오해해 왔다고 지적한다.

스데반의 설교는 지금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이들인 유대인들의 패역을 지적하며 정점에 이른다. 청중을 향해 그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 성경을 거스르는 자들이라고 혹독하게 지적한다. 급기야,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는 유대인들의 고소로 공회 앞에 끌려온 그는 이제 오히려 그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야말로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이다”라고 외친다.

김 교수는 이렇게 유대인들의 죄를 조목조목 지적한 스데반의 설교에 대해 “우회적이거나 타협적이지 않고, 매우 신랄하고 직선적”이라고 평한다. 이 정도면 스데반은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이 설교를 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김정훈 교수는 8월 20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서울 신반포중앙교회(김성봉 목사)에서 열리는 한국성경신학회 제20차 논문 발표회에서 ‘스데반의 신학적 논쟁: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의 설교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이 논문을 발표한다. ‘사도행전 주해와 신학’을 주제로 여는 이날 한국성경신학회 논문발표회에서는 또 장석조 교수(서울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가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회심과 소명의 의미와 기능’을, 허주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약학)가 ‘우리가 어찌 할꼬: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회개와 이를 통해 본 평양대부흥운동’을 발표할 예정이다. 논문 발표 뒤에는 종합 질의-응답 시간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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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 (행 7:55-60) — 생명샘교회

* 스데반의 순교

* 사도행전 7:55-60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본문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린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며 분노합니다. 반면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보였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스데반의 마지막 순간을 앉아서 보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은 벌떡 일어나 스데반의 순결한 믿음을 받을 준비를 하십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이를 갈며 분노하던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는 소리에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동등한 위치에 놓는 발언이었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신성모독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 들어 성 밖으로 끌고 갔습니다. 성난 폭도들은 일제히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스데반은 돌을 맞으면서도 여전히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여러모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공회에 잡혀간 것, 공회에서 재판을 받은 것, 거짓 증인을 세운 것, 처형을 당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간 것 등이 모두 닮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가장 예수님 같은 모습은 마지막 스데반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자신을 살해하는 사람들에게 죄를 돌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그 영혼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처럼,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깁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께 영혼을 의탁한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이미 기독론이 분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영혼을 맡을 수 있는 자, 즉 하나님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 적용

1. 예수님께서 벌떡 일어나게 하는 사람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서만큼은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십니다. 스데반의 순결한 믿음을 앉아서 받으실 수 없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좌에서 일어나게 하는 신앙을 보여야 합니다.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가 승리하기를 응원하며 힘주시고, 결국 우리의 순결한 믿음을 그 못자국난 두 손으로 받으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믿음을 보고 어떠한 표정을 짓고 계실까요?

2. 믿는 자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은 그저 잠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에 그의 몸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면 그저 오랜 수면에 들어간 것이지요. 그래서 “죽으니라”라는 표현 대신 “자니라’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또한 잠을 자는 것마저 그의 몸일 뿐입니다. 그의 영혼은 죽는 순간 이미 예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새롭고 영광스러운 삶이 시작된 것이지요. 믿는 자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그저 새로움과 영광스러움의 시작일 뿐입니다.

3. 믿는 자의 죽음은 이 땅에서도 헛되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한 청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데반을 죽였던 거짓 증인들은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 앞에 두었습니다. 돌로 칠 때는 항상 증인들이 먼저 돌을 던져야 했기 때문에 증인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고 가장 먼저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 앞에 두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스데반의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폭도들 중 한 청년을 조명합니다. 앞으로 그 청년이 예수님을 위해 복음전파의 중앙 무대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사울의 기억에 잊혀질 수 없는 충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구약 성경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 천사같은 얼굴, 자신은 보지 못하는 영적인 세계를 보는 영안, 죽으면서도 용서를 부르짖는 거룩함, 자신의 영혼을 사람이 아닌 자신의 주인에게 맡기는 당당함, 그 모든 것들이 사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로 살게 될 때에 스데반이라고 하는 이름은 그의 마음 한 켠에 늘 살아 있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불렀던 겸손함을 보였던 가장 주된 이유 중 하나도 스데반의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복음전파의 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스데반을 기점으로 복음은 예루살렘을 벗어나,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번져가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언제든 한번은 죽습니다. 좀더 일찍 가고 좀더 늦게 가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한 삶과 비교했을 때 아무리 길어봤자 어차피 한 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질입니다. 그러므로 그 삶과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성공한 인생은 벽에 똥칠할 때까지 평안히 산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된 불꽃같은 인생입니다.

4. 우리 인생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어야 합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은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과 도플갱어 수준이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사람이 아닌 영혼의 주관자에게 맡기는 모습이나, 자신을 살해하는 자들에게 죄를 묻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은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스데반을 얘기할 때 5가지의 충만을 말합니다. 성령충만, 지혜충만, 은혜충만, 믿음충만, 권능충만이었습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은 그의 성령충만함을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진면목은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그 심령에 예수님의 영으로만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았습니까? 엄마나 아빠를 닮았다는 말 대신,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을 더 자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주는 의미

스데반의 순교가 주는 의미(행7:54-60)

오늘은 지난 주일에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을 마무리하다.”라는 강설을 생각해 보기 전, 경북대학교 김중락 교수님의 글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명백한 한국어: 정말로 걱정입니다>

목사는 사제(제사장)가 아니라 교사(선생)이다.

목사는 자신이 사제가 아님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목사는 모든 사람이 사제임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목사는 고해성사를 받아주는 사제가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스스로 죄 고백을 할 수 있는 사제임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목사는 먼저 배운 성도, 즉 선생이다.

그러니 성도는 목사를 사제로서가 아니라 선생으로서 존경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500년이 지났는데 아직 ‘만인사제주의’에 이견을 제시하는 성직주의자들이 있다니 한국교회 정말로 걱정입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뿌리에 도끼를 들이대는 이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김중락 교수님의 글을 보면서 한국교회에 이런 분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현실의 목회를 보면 목회자의 영향력 즉 카리스마를 요구하는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모든 일에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스데반은 사도들과 성도의 교제를 하면서 교회의 일꾼에 충실했습니다. 사도가 모든 일에 책임을 지고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주의 일꾼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목사는 종교개혁을 하기전 사제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까? 목사사제주의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를 잘 읽어보십시오. 목사를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장로교가 신앙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를 보십시오. 그리고 개혁교회가 공인한 신앙고백서를 보아도 목사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벧전2:9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목사이든, 집사이든, 신자이든 성도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교에서는 “만인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만인제사장은 구원론에서 평등한 구원의 초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도 그들이 탁월하거나 거룩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성도도 탁월하거나 거룩해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평등한 구원의 초대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스데반처럼 충실하게 일꾼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특별한 행위와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거룩하게 하심으로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생각하면서 거룩한 공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강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한 강설을 통해 교회가 해야 할 일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팡이교회에 있어서 예배당이 중요하듯이 출애굽을 한 유대인들에게 “성막”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영광스러운 역사를 지닌 의미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만들었고, 그곳 “두 돌판”에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을(십계명) 보관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막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한 후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다윗은 하나님께 성전을 짓도록 요구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성전을 짓도록 허락을 받지만 완전한 건축은 솔로몬이 한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성전에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무소부재하고 전능하신 분이신데 성전이 건축됨으로 그 안에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성전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모형일 뿐입니다. 성전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당신님께서는 요2:19절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의미만 알아도 성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이든 성전이든 그 안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처럼 집이 필요한 피조물이 아니라 신 그자체입니다. 스데반은 공회와 거짓 증인 자들이 알 수 있도록 이사야가 말한 예언을 가지고 와 인용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라고 함으로 성막도 성전도 영원히 지속되도록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말입니다.

성막과 성전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너희와 언제나 함께 하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순종과 신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요 성전입니다.(고전3:16) 우리도 스데반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에 대한 역사적인 것을 말한 스데반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강한 책망을 합니다. 이런 용기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회 앞에서 너희들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라는 것입니다. 현대판으로 말하면 판사와 검사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놀라운 책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랑할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신뢰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셨지만 그들은 참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순종이 아닌 멸시와 천대 그리고 십자가에 죽였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직설적으로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라고 함으로 너희들이 누구인가를 추궁하면서 회개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이 고발한 나는 율법을 준수한 자라는 것으로 긴 강설을 마무리합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너희들은 율법을 주신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나는 믿음으로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스데반의 긴 강설을 4주 동안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우리만 들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과 자유민들도 들었습니다. 스데반의 최후진술을 들었던 그들은 회개하기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오늘은 참된 일꾼이었던 스데반의 최후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한 분이라면 스데반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순교일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면서 가장 위대한 일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순교를 당할 것을 각오하면서 담대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율법과 성전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이런 스데반을 예수님께서도 신실한 종으로 심판대 앞에서 변호하여 주시고 시인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스데반과 같은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님께서 변호하여 주시고, 시인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스데반으로부터 긴 강설을 들은 자들은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을 했습니까? 스데반으로부터 강한 책망을 들은 자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를 5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함으로 스데반이 말한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회개를 강조하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참 구주로 믿음으로 고백하도록 전하는 소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소식을 들으면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공회에 모였던 자들은 마음이 강퍅하고 더욱 완악하여 짐으로 그들의 반응은 ‘이를 갈면서’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던 공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 때에 스데반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55절을 보시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하나님의 영광과 당신님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한 것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마지막 순교를 아시기 때문에 그가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누가는 공회에 모인 자들과 스데반을 대조함으로 그들의 완악함과 성령 충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전하고자 한 것이라 믿습니다. 원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완악한 자들이었지만 스데반에게 믿음을 주시고 일꾼이 되게 한 것을 생각하면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 아실 줄 믿습니다. 지팡이교회가 가는 길을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안위하여 주는 것처럼 스데반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공회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는 스데반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편에 서신 것을 스데반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고백하고 시인함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너는 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상의 법정에서는 정죄를 당하지만 하늘의 법정에서는 예수님께서 변호하시고 시인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훗날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공회에 모인 자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형통한 것 같지만 스데반은 성공과 세상적인 형통을 위한 믿음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믿고 성공한 사람으로 주님과 동행을 하는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담대함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공회 앞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강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하였지만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회개하기 보다그들은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여전히 스데반은 성령 충만함으로 오히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56절을 보시면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하늘을 웅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고, 순교를 앞두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이 지금 어떠한 일을 당할 것을 아시고 너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눅12:8절을 보시면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예수께서는 고난 받는 스데반을 하늘의 법정 앞에서 옹호해 주며 또한 순교 당할 그를 영접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와 반대로 악한 자들은 어떠한 모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57절을 보시면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스데반의 증거에 대한 강렬한 저항은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귀를 막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제히 스데반에게 마치 돌격 앞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해서 강설로 들은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 즉 빌라도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공회에서 스데반에 대한 사형 집행은 불법입니다. 공회는 로마법에 따른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감정적으로 죽이고자 하는 것을 보면 스데반의 강설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강설이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회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은 것을 보면 스데반의 순교가 절정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합법적인 절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을 어디로 데리고 갑니까? 58절을 보시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어디입니까? 성 밖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레24:14절을 보시면 “그 저주한 사람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손을 그의 머리에 얹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를 보시면 그들이 머물고 있던 장소에서 진영 밖으로 즉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아가서 죽이라는 구약의 법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마치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가신 거리와 스데반이 공회에서 성 밖으로 이동한 거리를 보면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을 그냥 끌고 간 것이 아니라 아마도 예수님처럼 학대를 하면서 갔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끌고 가면서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한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감정은 강퍅함으로 분노가 가라앉기 보다는 너를 반드시 죽이리라고 하면서 간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강설을 들으면서 오히려 증오와 적개심으로 끌고 가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성 밖으로 나아와서는 스데반을 돌로 치고 있는 가운데 어떠한 행동을 합니까? 돌로 치는 자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갖다 놓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묵시적으로 스데반을 죽이도록 승인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동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서 시민을 이용하는 것은 사악한 자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돌과 무기 등으로 맞으면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됩니까? 자신을 보호하고자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보시면 그것도 돌로 맞고 있는 가운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59절을 보시면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시인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우편에서 자기를 맞이하려고 서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님을 하나님께 부탁한 것처럼 스데반도 자신의 몸과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죽으시면서 우리를 위해 용서와 사랑이 있었던 것처럼 스데반도 사도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희생정신을 알기 때문에 스데반도 사랑의 정신이 그대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인생의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60절을 보시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처럼 스데반도 용서를 위한 기도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된 일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기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돌로 죽이도록 한 배후 즉 사울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 위대한 사도요, 제자요 복음의 일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저도 스데반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싶습니다. 저도 연약한 목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기도가 자신의 생명을 빼앗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스데반하면 최초의 순교자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장에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최초의 순교자이니 너희들도 순교자가 되어라가 아닐 것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생활에서 복음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통해 드러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보이는 성전과 신약의 예배당 안에 매여 있지 않고 신자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이 확장되는 전환기에 발생한 것으로 그의 증거는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루살렘에만 있던 복음을 이제는 땅끝까지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에게 ‘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회는 강퍅한 마음으로 돌로 치지만, 스데반은 정반대로 평안과 고요하다는 의미로 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을 감당하고 부활을 소망하면서 편안한 잠을 청하면서 주님께서 자신을 낙원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 행복을 비전으로 둔 자가 아니라 이미 죄를 이긴 행복자로서 자신이 행복하고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행복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믿음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나를 자랑하기보다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의 긴 강설과 순교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초대 교회는 구약의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고 구약의 종교와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을 역사적인 믿음의 조상과 율법 그리고 성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 알고 있던 하나님께서는 성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나 임재하시고 당신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다는 것을 스데반의 순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핵심 증거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거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듣고 어떠한 반응을 합니까? 이런 현실 속에서 스데반이 보여준 믿음은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며 죽음의 자리에서도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살아 있을 때만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도 스데반은 우리에게 마치 이런 신앙고백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신자들이 받는 박해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케 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53장에서 주의 종이 당하는 박해가 많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한 구원 사역이라는 것처럼 스데반도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제는 온누리로 확장될 것을 알리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는 세상에서 죄악에 항거하거나 동화되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고백 하는 성도라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시대적인 환경에 있습니다. 스데반처럼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핍박받을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안 후 참된 제자가 됨으로 이처럼 스데반이 참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 주님의 제자로 양육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양육 받음으로 스데반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교회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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